불륜의 대가, 그리고 시작되는 새로운 사랑
저녁 식사가 끝나갈 무렵, 서연이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주호도 전화가 왔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테이블에는 민지와 현우만 남겨졌다.
"주호씨가 민지씨 남자친구였군요."
현우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빛은 복잡했다.
민지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어떻게 알았어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죠. 두 분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특별하니까요."
현우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조금 쓸쓸해 보였다.
"솔직히 좀 실망이긴 하네요. 민지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거든요."
민지는 당황했지만, 현우의 솔직함에 웃음이 나왔다.
"미안해요. 말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요."
현우는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민지씨, 행복해 보이지 않네요. 특히 오늘."
민지는 말문이 막혔다.
현우의 관찰력이 놀라웠다.
그녀는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믿지않는 눈치였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제가 물러서야 할 타이밍 같은데... 그렇게 못하겠네요."
"무슨 뜻이에요?"
"더 솔직해질게요. 민지 씨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심이에요. 남자친구가 있다고 해서 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민지는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현우의 직설적인 고백이 예상치 못했다.
"물론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물러서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요. 민지 씨가 행복하다면 몰라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호와 서연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는 민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다음 날, 민지의 사무실로 꽃다발이 배달되었다.
카드에는 간단한 메시지만 적혀 있었다.
'진심을 말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 현우'
그날 오후, 민지는 패션 행사 준비 회의를 위해 현우의 개인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문적이고 친절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전날 밤 말했던 진심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 샘플은 어떤가요? 민지 씨와 함께 찍는 콘텐츠에 특히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는 고급 패션 아이템을 민지에게 건넸다.
그들의 손이 스쳤고, 현우는 의도적으로 손을 좀 더 오래 접촉시켰다.
"주말에 시간 되세요? 브랜드 측에서 VIP 시사회 티켓을 보냈는데, 함께 가면 좋을 것 같아서요."
민지는 망설였다.
그의 제안이 단순히 업무적인 것이 아님을 알았다.
"미안해요, 주말에는..."
"주호 씨와 약속 있으신가요?"
현우의 직설적인 질문에 민지는 당황했다.
그는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언제든 시간 되실 때 말씀해주세요. 제 제안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요."
그날 이후로 현우의 '적극적인' 호감 표현은 계속되었다.
꽃다발, 작은 선물, 그리고 항상 눈빛에 담긴 특별한 관심.
그는 민지가 주호와 연인 관계임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민지가 현우의 관심에 조금씩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솔직함, 지적인 대화, 그리고 그녀를 향한 확고한 지지가 민지의 마음에 작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 주말 ---
양평의 한적한 캠핑장.
소나무 숲 사이로 가을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고 있었다.
"여기 딱 좋은데?"
주호는 평평한 땅을 발로 툭툭 치며 민지에게 물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데이트, 그것도 캠핑은 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주호가 제안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프로젝트였다.
"와, 주호야. 준비 정말 많이 했구나."
민지는 주호가 차에서 꺼내는 캠핑 장비들을 보며 감탄했다.
텐트부터 침낭, 접이식 테이블, 의자, 심지어 휴대용 BBQ 그릴까지. 모두 새것처럼 보였다.
"캠핑 유튜브만 일주일 봤어. 처음이라 좀 서툴 수도 있는데 이해해줘."
두 사람은 함께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기둥이 엉키고, 천이 뒤틀리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지는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회사 일, 서연, 현우... 모든 복잡한 생각들이 이 숲속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아이, 이게 왜 이러지?"
주호가 텐트 팩을 망치로 치다가 손가락을 살짝 찧자,
"주호야 괜찮아?"
주호는 웃으며 민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그리고 민지야 여기 있는 동안은 우리 둘만 생각하자."
주호의 말에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햇살 아래서 그녀의 향기는 더욱 달콤했다.
"사랑해, 민지야."
늦은 오후, 두 사람은 그릴에 고기를 구우며 와인을 마셨다.
석양이 숲 너머로 붉게 물들고, 별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캠핑장은 한적해서 그들 외에 몇 팀밖에 없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 마치 둘만의 세계 같았다.
"민지야 줄게있어 잠시 앉아봐."
주호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민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은반지가 들어있었다.
"민지야 우리 평생 함께하자."
결혼 반지라기엔 화려하진 않았지만 주호에 프로포즈 였다
민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호는 민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완벽하게 맞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두 사람의 대화는 더 깊어졌다.
과거의 추억, 서로의 꿈,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와인 한 병이 비워질 때쯤, 주호는 민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텐트 들어갈까?"
텐트 안은 아늑했다.
주호가 준비한 작은 LED 랜턴이 은은한 빛을 뿌렸다.
침낭 두 개를 하나로 연결해 넓은 침대처럼 만들었다.
민지는 주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고마워, 주호야. 이런 시간이 필요했어."
주호의 손이 민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입술이 만났을 때, 텐트 밖의 세상은 잊혀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완전한 친밀감, 그리고 애정의 순간이었다.
그들의 몸이 하나로 이어졌을 때, 민지는 모든 고민과 불안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주호의 따뜻한 품 안에서, 그녀는 안전함을 느꼈다.
숲속의 밤, 별빛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얽힌 숨결, 뜨거운 체온, 그리고 속삭임으로 가득 찬 시간이 흐른 후.
"민지야, 네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
주호의 진심 어린 고백에 민지는 미소 지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핸드폰 알림음이 텐트 안을 울렸다.
삐링-
민지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방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주호는 눈을 깜빡이며 민지를 바라보았다.
"방해 금지 모드 안 켰어?"
민지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에 현우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미니민지님, 내일 패션 행사 리허설 시간 조정되었습니다. 11시에 뵐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오늘 캠핑 즐겁게 보내세요 :)]
주호의 눈이 메시지로 향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캠핑 간다고 현우씨한테 말했어?"
민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그냥 주말 계획 물어봐서 캠핑 간다고만..."
"그리고 웃는 이모티콘까지? 꽤 친해 보이네."
주호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민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주호의 손을 잡았다.
"업무적인 관계야, 정말로. 내일 행사 준비 때문에..."
주호는 뭔가 더 말하려다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민지를 다시 안았지만, 몇 분 전의 따뜻함은 사라진 듯했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호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을 밀어내려 애썼다.
현우와 민지. 그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민지였다. 그가 사랑하는 민지.
"민지야..."
주호는 불안한 마음에 민지를 더 꼭 껴안았다.
그녀의 체온이 그를 안심시켰다.
민지는 주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주호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민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랜턴 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에는 맑은 감정이 가득했다.
주호는 그 눈빛을 보며 자신의 불안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과거의 아픔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었다.
오직 현재, 이 순간의 사랑만이 존재했다.
"사랑해, 주호야."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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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민지는 눈을 떴을 때 주호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작은 휴대용 버너에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일어났어? 잘 잤어?"
주호의 미소는 따뜻했다.
어젯밤 주호의 불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했다.
"응, 정말 잘 잤어. 너무 행복해서 꿈인 줄 알았어."
민지는 주호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를 안았다.
오늘은 현우의 패션 행사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캠핑장을 정리했다.
차에 짐을 싣는 동안 민지는 주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11시에 패션 행사 리허설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주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지만, 그는 곧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내가 데려다줄게."
차 안에서 민지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현우에게서 온 메시지가 몇 개 더 있었다.
리허설 세부 사항과 준비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민지는 주호가 볼까 봐 재빨리 메시지를 닫았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주호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캠핑의 여운이 남아있는 듯했지만, 민지는 그의 마음속에 다른 감정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려줄게."
강남의 패션 행사장 앞에 차를 세우고 주호가 말했다.
민지는 그에게 작별 키스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내일 봐. 행사 잘 해."
민지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그녀는 주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민지씨, 시간 맞춰서 와주었네요!"
행사장 입구에서 현우가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멋져 보였다.
특별히 디자인된 블레이저와 독특한 액세서리를 착용한 그는 마치 런웨이 모델 같았다.
"오늘 중요한 날이니까 완벽하게 준비해봤어요."
민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허설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수십 명의 모델과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민지와 현우는 핵심 진행자로서 모든 것을 조율해야 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추며 일했다.
"이 부분은 민지씨가 인트로를 하고, 제가 이어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현우의 제안에 민지는 동의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포지션을 조율하며 스크립트를 연습했다.
"두 분 케미가 정말 좋네요!"
연출 디렉터의 말에 스태프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민지는 어색하게 웃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모두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렸다.
케이터링이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다는 소식에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그때, 행사장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저기, 누가 왔어요!"
민지는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주호였다. 그는 큰 보냉백을 양손에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민지 남자친구입니다. 응원차 도시락 좀 가져왔습니다."
주호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그는 민지를 향해 걸어왔고, 그 뒤로 스태프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따라왔다.
"주호야, 이게 무슨..."
"케이터링이 늦는다고 해서. 내가 지나가다 들었거든."
그는 미소 지으며 보냉백을 내려놓았다.
안에는 각종 도시락과 음료가 가득했다. 모두를 위한 양이었다.
"여러분, 드세요. 여기 다 있습니다."
스태프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도시락에 달려들었다.
현우는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호에게 다가왔다.
"주호씨,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주호는 현우와 악수를 나누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 뒤에는 다른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민지가 아침부터 바쁘게 나가서, 응원도 할 겸 왔습니다."
민지는 주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는 자신의 불안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정말 고마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내 여자친구인데, 당연한 거지."
주호가 '여자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현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주호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주호씨도 같이 드세요. 충분히 가져오셨네요."
현우의 제안에 주호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행사장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주변에는 스태프들이 도시락을 맛있게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민지씨와 어제 캠핑 다녀오셨다고요? 날씨가 좋았겠네요."
현우의 물음에 주호는 민지를 바라보았다.
"네, 정말 좋았습니다. 민지와 함께하는 시간은 늘 특별하니까요."
주호의 말에 민지는 얼굴이 붉어졌다.
현우는 그들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민지 씨, 손에 새 반지가 보이네요. 아름다운 반지예요."
현우의 눈은 날카로웠다. 민지는 자신도 모르게 반지를 만졌다.
"어제 주호가 프로포즈 선물로 준거예요."
세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주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회사에서 급한 일이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미안해,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주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민지에게 다가가 이마에 살짝 키스했다.
"행사 잘 해. 저녁에 데리러 올게."
그의 행동은 명백한 메시지였다.
현우는 그것을 분명히 이해한 듯했다.
주호가 떠난 후, 현우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좋은 사람이네요, 주호씨."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주호의 사랑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는 것.
--- 스카이 본사, 오후 6시 ---
"이상으로 오늘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호는 회의실에서 나오며 시계를 확인했다.
예상보다 회의가 빨리 끝났다.
그는 서둘러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재킷을 챙겼다.
민지의 패션 행사가 7시에 끝날 예정이었고, 그는 약속대로 그녀를 데리러 가려 했다.
"저녁 약속 있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주호는 고개를 돌렸다.
서연이 회의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조금 창백해 보였다.
"응, 민지 데리러 가야 해."
주호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와 서연은 그날 밤 이후로 업무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주호야, 잠깐만. 할 말이 있어."
서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연의 눈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미안해, 지금 급해서..."
"정말 중요한 얘기야. 30분만... 아니, 잠시만이라도 시간 좀 내줘."
서연의 간절한 목소리에 주호는 망설였다.
그녀의 평소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주호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알았어. 그럼 잠깐이야."
주호는 민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일이 좀 늦어질 것 같아. 30분 정도 늦을게. 미안해.'
두 사람은 회사 근처의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늦은 오후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구석 자리에 앉은 그들은 커피를 주문했다.
"무슨 일이야? 평소랑 달라 보여."
주호의 물음에 서연은 컵을 만지작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주호야 나 사실 그날 밤 이후로..."
주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싫었다.
"서연아, 우리 이미 그 얘기는..."
"나 임신했어..."
서연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주호의 귀에는 폭탄처럼 울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뭐라고?"
주호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병원에서 확인했어. 4주 차... 시기상 그날 밤이 맞아."
주호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심호흡을 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확실해? 정말... 내 아이가 맞아?"
그의 질문에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주호 너밖에 없어. 미국에서 돌아온 후로..."
카페의 조용한 음악이 그들 사이의 무거운 침묵을 채웠다.
주호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민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캠핑에서 그녀와 나눈 약속,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
"어떻게... 하고 싶어?"
주호의 목소리는 떨렸다. 서연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직 결정 못 했어.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래서 주호 너에게 먼저 말하고 싶었어."
서연은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초음파 사진이었다.
"아직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이지만..."
주호는 봉투를 바라보았지만, 손을 뻗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시간이 필요해. 이건... 너무 갑작스러워."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아.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혼자 결정하긴 너무 무서워."
주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서연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생각할 시간을 줘. 나도 너무 갑작이라 이상황이 너무 혼란 스러워."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리고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서연은 주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갑고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주호야. 정말 무서웠어... 혼자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할까봐."
주호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민지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
괜찮아, 이해해. 행사 끝나고 집에 갈게. 내일 봐요.'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주호는 깊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는 서연의 손을 부드럽게 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서자. 둘 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주호의 말에 그녀는 봉투를 다시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래..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카페를 나서는 주호의 걸음은 무거웠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버릴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민지를 생각했다.
그녀와의 행복한 시간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잃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
하지만 서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책임을 져야 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지만, 서연의 눈빛에서 거짓은 보이지 않았다.
주호는 갑자기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민지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행사장이야? 마치면 데리러 갈게.'
몇초후 민지의 답장이 왔다.
'응, 아직 마무리 중이야. 30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주호는 심호흡을 하고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의 핸들을 잡았다.
그는 민지에게 당장 모든것을 말할수는 없었다.
더 확실해질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 정리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패션 행사장 앞에 도착했을 때,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호는 입구에서 기다렸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가슴은 무거웠다.
"주호야!"
민지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화려한 패션 행사의 분위기에 맞게 평소보다 더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목에 걸린 카메라가 그녀의 직업적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민지는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웃음에 주호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행사 어땠어?"
"정말 성공적이었어! 현우씨가 기획한 부분이 특히 반응이 좋았고... 어, 괜찮아? 얼굴이 안 좋아 보여."
주호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회사 일이 많았어."
주호는 민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손을 잡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아팠다.
"집에 데려다줄게."
차 안에서 민지는 행사에 대해, 그리고 주호가 가져다준 도시락 덕분에 모두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이야기했다.
주호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민지의 이야기에 적절히 대답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색하게 들렸다.
"정말 괜찮아? 뭔가 다른 것 같아."
민지의 직관은 언제나 날카로웠다.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래. 걱정마."
민지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주호는 그녀를 현관까지 바래다주었다.
평소 같으면 키스를 하고 헤어졌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주호는 민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들어가. 내일 봐."
민지는 주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알았어. 내일 봐. 사랑해."
주호는 민지가 현관문을 닫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차로 돌아와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 3일 후 ---
주호는 서연과 다시 만났다.
그들은 병원에 함께 가서 정확한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변함없었다.
서연은 확실히 임신했고, 시기상 주호의 아이가 맞았다.
주호는 이틀 동안 민지의 연락을 최대한 피했다.
그는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그날 밤, 주호는 오랫동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민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민지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하지만 내가 너한테 계속 상처를 줄 것 같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 없이도.'
메시지를 보내고 주호는 핸드폰을 침대 위에 던졌다.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몇 초 후, 핸드폰이 진동했다. 민지의 전화였다.
주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전화가 왔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대신 그는 또 다른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 받을 수 없어. 제발 이해해.'
민지의 메시지가 곧바로 왔다.
'무슨 일인지 말해줘. 어제부터 네가 이상해보였지만... 내가 뭘 잘못했어?'
주호의 가슴이 찢어졌다. 민지가 자신을 탓한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전부 내 잘못이야.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 내일 저녁에.'
주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민지를 다시 볼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눈을 보면 모든 것을 말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안 돼. 미안해.'
민지의 답장이 없었다. 그리고 몇 분 후, 주호의 집 벨이 울렸다.
주호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분명 민지였다. 그녀는 내가 연락이 안되면 집으로 찾아오곤 했었다.
주호는 현관문으로 향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이젠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을 열자 그곳에 서있던 사람은 민지가 아니었다.
"주호야, 나왔어..."
서연이었다. 그녀는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고, 평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 주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연아... 여긴 어떻게?"
"주호 너 술에 취했을때 내가 데려다줬었자나.그날밤..."
서연은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과 외로움이 가득했다.
"들어가도 될까? 무섭고 불안해서 혼자 있을수가 없어..."
주호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 덤덤해 보여 거절할 수 없었다.
임신한 여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
서연은 주호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갑자기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재료 좀 사왔어. 주호, 떡볶이 잘 만들잖아."
주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대학 시절, 그는 종종 동아리 친구들을 위해 떡볶이를 만들어주곤 했다.
서연도 그때 그의 떡볶이를 좋아했었다.
"임신하면 이런 거 먹고 싶어지나 보네."
서연은 부엌으로 향했다. 주호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부엌에서 서연은 재료를 꺼내며 갑자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먹고싶은게 많았는데 그중에 주호 니가 만들어준 떡볶이가 너무 먹고싶었어.
그리고... 주호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혼자 있으니까 너무 무서워."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주호는 그녀의 불안을 이해했다. 갑작스러운 임신 소식은 그녀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알았어. 내가 만들어줄게."
주호는 떡볶이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민지와 함께 요리하며 웃고 떠들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연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민지에게 보낸 메시지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호야 민지씨는 이사실을 알아?"
서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주호는 칼질을 멈췄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안해... 이런 상황 만들어서.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주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탓하는 게 아니야. 둘 다 책임이 있어. 그저..."
그때, 다시 현관 벨이 울렸다. 주호와 서연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혹시 누구 오기로했어?"
서연이 물었다.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문 밖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부엌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인터폰 화면에는 민지가 서 있었다.
주호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문을 열면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고, 열지 않으면 민지는 계속 기다릴 것이다.
그는 잠시 서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로 했다.
"민지야..."
문이 열리자 민지가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붉었고, 평소의 단정한 모습이 아니었다.
분명 울었던 흔적이 있었다.
"이유라도 알고 싶어서 왔어.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주호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뒤쪽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 있어?"
주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서연이 부엌에서 나왔다.
그녀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마치 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민지씨..."
서연의 목소리는 놀란 듯했지만, 어딘가 승리의 기색이 묻어 있었다.
민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이 주호와 서연을 번갈아 향했다.
"이게... 무슨..."
주호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민지야,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하지만 그의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서연이 부엌에서 나와 주호 옆에 섰을때, 그 장면은 마치 한 가정의 모습 같았다.
"민지씨, 오랜만이에요."
서연의 말에 민지의 눈에 상처가 깊게 새겨졌다.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이해가 돼...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
주호는 필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아니야, 민지야. 이건..."
그때 서연이 불쑥 말을 꺼냈다.
"민지씨, 사실... 저 임신했어요."
시간이 멈춘 듯했다. 민지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주호는 서연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민지가 알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서연아..."
"언젠간 알게 될거자나. 그냥 지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민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그랬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주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민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더 이상 설명하지 마. 이제 다 알았으니까."
민지는 주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분노보다 깊은 상실감이 담겨 있었다.
"캠핑장에서 나한테 프로포즈 왜 했던거야? 그때는 몰랐어?"
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됐어.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
민지는 현관문을 향해 돌아섰다.
주호는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권리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가 문 앞에 섰을 때,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행복해, 두 사람 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 두 달 후 ---
서울의 한 호텔 연회장 앞에 '주호 & 서연 결혼식'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급작스러운 결혼이었지만, 스카이의 많은 임직원들이 참석했다.
주호의 표정은 밝지 않았지만, 신랑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었다.
서연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배는 아직 티가 나지 않았다.
그날 오후, 강남의 한 카페.
"민지씨, 요 부분은 조금 더 밝은 색감으로 가는 게 어떨까요? 타깃층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니까."
현우는 태블릿으로 새 콘텐츠 기획안을 보여주고 있었다.
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했지만, 그녀의 집중력은 온전하지 않았다.
지난 두 달간 그녀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주호에 관한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민지씨? 듣고 계세요?"
현우의 목소리에 민지는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죄송해요. 아까 말씀하신 색감 조정... 좋은 것 같아요."
현우는 민지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두 달 전 그녀가 겪은 일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친구이자 동료로서 곁에 있어주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스카이 마케팅팀의 이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민지와 현우의 테이블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머, 민지씨! 현우씨! 여기서 뵐 줄이야."
이과장은 자리에 합석했다. 그는 방금 어디서 왔는지 흥분된 얼굴이었다.
"방금 주호 과장님 결혼식 다녀왔어요. 정말 멋졌어요!"
민지의 손이 커피잔을 잡다가 멈췄다.
현우는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새로 온 이과장은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이야기했다.
"진짜 깜짝 놀랐어요. 서연 팀장님 임신했다고 들었을 때... 그래도 오늘 드레스 입은 모습 정말 예뻤어요.
주호 과장님은 좀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현우가 헛기침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민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 민지씨... 혹시 주호 과장님이랑 친했죠? 초대 안 받으셨어요?"
현우가 이과장의 팔을 꼬집었다. 그제서야 이과장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저... 미안해요.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이과장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현우는 민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민지 씨, 우리 미팅 끝내고 저녁 같이 먹을까요?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 가보고 싶었거든요."
민지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다음에요."
민지는 곧바로 일어섰다.
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아요?"
"네, 그냥 집에서 쉬고 싶어요."
하지만 민지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그녀는 한강변 작은 술집으로 향했다.
주호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던 곳이었다.
민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소주를 주문했다. 한 병, 두 병...
그녀는 잔을 비우며 창밖으로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강물 위에서 반짝였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무거웠다.
세 번째 병을 비울 무렵,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달 동안 참아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민지 씨?"
익숙한 목소리에 민지는 고개를 들었다. 현우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현우 씨... 어떻게..."
"직감이었어요. 여기 오실 것 같았어요."
현우는 자리에 앉았다. 그는 주인에게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주문했다.
"저도 한 잔 할게요."
민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보지 마세요. 지금 꼴이..."
"괜찮아요.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돼요."
현우의 다정한 목소리에 민지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현우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왜 이렇게 아픈 걸까요... 이미 끝난 일인데..."
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우는 그녀에게 물티슈를 건넸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요. 시간이 필요한 거죠."
민지는 물티슈로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화장이 다 지워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창피해요.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현우는 미소 지었다.
"저한테 창피할 필요 없어요. 저는 민지씨의 모든 모습을 좋아하니까요."
그의 솔직한 고백에 민지는 잠시 말을 잃었다. 현우는 소주잔을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오늘은 실컷 울고, 실컷 마시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해요. 제가 옆에 있을게요."
민지는 조용히 잔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지만, 강물 위로 반짝이는 불빛들이 밤을 밝히고 있었다.
--- 일주일 후 ---
"민지 씨, 이 원단 어때요? 다음 컬렉션에 쓰려고 하는데."
현우는 민지의 책상에 천 샘플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에는 커피 두 잔도 들려 있었다.
하나는 카라멜 마키아토, 민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근데 굳이 직접 가져올 필요는 없었는데..."
현우는 미소 지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종이봉투를 하나 더 내밀었다. 안에는 따뜻한 크로와상이 들어있었다.
"아침 못 드셨다고 하셔서요."
민지는 작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현우는 이렇게 작은 관심들을 계속 보여주었다.
아침 커피, 점심 약속, 퇴근 후 영화... 그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지만, 동시에 민지를 압박하지도 않았다.
"정말 고마워요. 근데 이러다 회사 사람들이 오해할 거예요."
"오해라뇨? 전 진심인데요."
현우의 솔직한 대답에 민지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정직했다.
"민지 씨,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새로 나온 전시회 티켓이 있는데..."
민지는 크로와상을 꺼내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오늘은 새 콘텐츠 촬영이 늦게 끝날 것 같아요. 다음에요."
현우의 표정이 살짝 실망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곧 미소를 되찾았다.
"네, 다음에요. 기다릴게요."
그의 '기다릴게요'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다음 약속을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었다.
민지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이었다.
오후 3시, 강남의 한 고급 스튜디오.
민지는 새 패션 브랜드의 콘텐츠 촬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델들의 포즈를 조정하고, 조명을 확인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일에 몰두하면 적어도 마음의 상처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자, 이제 마지막 세트! 모두 준비됐나요?"
민지는 스태프들에게 지시하며 카메라를 확인했다.
그때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스카이 마케팅팀에서 왔습니다. 오늘 촬영 진행 상황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 목소리에 민지의 손이 멈췄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주호였다. 그는 정장 차림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서 있었다. 그의 눈이 민지와 마주쳤을 때, 둘 다 얼어붙었다.
"민... 민지야?"
주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명 그도 이 만남을 예상하지 못했다. 민지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주호씨. 여기는 어쩐 일로...?"
"마케팅팀에서 이번 콜라보레이션 진행 상황을 점검하러 왔어. 담당자가 바뀌어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주변의 스태프들이 상황을 눈치채고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거의 마무리 단계예요. 결과물은 다음 주에 보내드릴게요."
민지는 전문적인 어조로 말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간단히 브리핑 받을 수 있을까요?"
민지는 잠시 망설였다. 그를 피하고 싶었지만, 이것은 업무였다.
"네, 촬영 마무리되면 시간 낼 수 있어요."
한 시간 후, 촬영이 모두 끝났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정리하는 동안, 민지는 주호와 스튜디오 한쪽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태블릿으로 촬영 내용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런 콘셉트로 진행했고, 타깃 층은 MZ세대 초반으로 잡았습니다."
주호는 태블릿을 보는 척했지만, 그의 시선은 계속 민지의 얼굴로 향했다.
그녀는 예전보다 더 마르고 창백해 보였다.
"민지야..."
갑자기 그가 사적인 어조로 말했다. 민지는 태블릿에서 눈을 들었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에요, 주호과장님."
주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 미안해... 그냥...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민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주호도 많이 변해 있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고, 전체적으로 지쳐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녀의 차가운 대답에 주호는 고개를 숙였다.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을까? 업무 얘기도 더 해야 하고..."
민지는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주호의 간절한 눈빛에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럼 점심먹으면서 이야기 하는걸로 해요."
그들은 스튜디오 근처의 조용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메뉴를 살펴보았지만, 사실 둘 다 음식에 관심이 없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주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지는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응, 일도 많고... 주호 너는 얼마전 결혼식했다면서?"
그녀의 질문에 주호의 표정이 굳었다.
"...어."
" 진심으로 축하해 ."
주호는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어쩔수 없이 한 결혼식이야... 내 마음은..."
그의 말끝이 흐려졌다. 민지는 이미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만해요. 이런 얘기 하면 안 돼요. 당신은 이제 남편이자 곧 아버지가 될 사람이에요."
주호는 고개를 들어 민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모든 걸 망쳤어."
민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도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에요.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그래도... 네가 알았으면 해. 내가 정말 너를..."
"그만!"
민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제발... 그만해.그 이야기는 다신 하고 싶지않아"
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리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뺐다.
"현우라는 사람... 좋은 사람 같더라."
"너희 회사에 몇 번 갔었어. 그 사람이 널 바라보는 눈빛을 봤어."
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은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지?"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하지만 될 수 있잖아."
민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주호는 고개를 숙였다.
"알아...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 앞에 서 있었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 가져왔어?"
주호가 물었다. 민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회사까지 택시 탈 거예요."
주호는 자신의 우산을 펼쳤다. 그는 망설이다가 우산을 민지에게 건넸다.
"가져가. 난 차 가지고 왔으니까."
민지는 우산을 받지 않았다.
"필요 없어요. 저 이제 갈게요."
그녀가 돌아서려 할 때, 주호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민지야...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할게.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해. 매일 밤 꿈에서 너를 봐. 그리고 네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민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주호의 손을 떼어냈다.
"늦었어요. 모든 게 다 늦었어요."
그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주호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빗물에 옷이 젖었지만, 그는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더 차갑게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