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저녁 식사가 바꾼 운명 #9
--- 며칠 후 ---
강남의 한 카페, 창가 자리.
주호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한 그는 세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민지가 연락해 만나자고 했을 때, 그는 놀랐다.
지난 며칠간 그녀의 연락을 피했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카페 문이 열리고 민지가 들어왔다.
평소보다 더 단정한 차림이었다.
주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래 기다렸어?"
민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는 주호 앞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눈까지 닿지 않았다.
"아니, 방금 왔어."
첫 마디부터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주호는 민지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서연과의 밤이 자꾸 떠올랐다.
"커피 마실래?"
"응, 아메리카노로."
주호가 커피를 주문하는 동안, 민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주호야..."
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주호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사과해야 할 상황인데, 민지가 먼저 사과를 하고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어. 서연이 일로 네게 화내고, 연락도 안 받고... 내가 좀 유치했던 것 같아."
민지의 눈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주호는 목구멍이 메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내가..."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서연과 하룻밤을 보냈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말끝을 흐렸다.
"내가 좀 더 솔직하게 얘기했어야 했는데."
민지는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눈까지 웃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좀 어리석었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잖아. 중요한 건 지금부터야."
주호는 민지의 손을 꼭 잡았다.
죄책감이 그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지만, 민지의 따뜻한 미소 앞에서 그는 서연과의 일을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
그것은 술에 취한 실수였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고마워, 민지야. 난 정말 널..."
"알아. 나도 널 사랑해."
민지는 주호의 말을 끊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들의 손가락이 서로 얽혔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은 사라진 듯했다.
그날 저녁, 주호는 민지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현관 앞에서 그들은 오랜만에 키스를 나눴다.
주호는 민지를 꼭 안았다.
그녀의 체온, 향기, 그리고 모든 것이 그에게 익숙했다.
이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내일 봐."
민지가 문을 닫자, 주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는 민지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었지만,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그것은 그저 하룻밤의 실수였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주호는 집으로 걸어가며 서연에게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미안해, 그날 일은 실수였어. 우리 앞으로 업무적인 관계만 유지하자.'
하지만 서연의 답장은 없었다.
주호는 불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 믿고 싶었다.
--- 한 달 후 ---
스카이 본사 회의실. 마케팅 프로젝트 중간 평가 회의가 막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주호는 서류를 정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한 달간 그는 서연을 최대한 피해 다녔다.
필요한 업무 연락만 이메일로 주고받았고, 회의에서도 직접적인 대화는 피했다.
"주호야, 오늘 발표 정말 좋았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주호는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고, 표정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날 밤의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아... 고마워."
주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인플루언서 협업 부분, 결과가 정말 좋더라. 민지씨 덕분인 것 같아."
민지의 이름이 언급되자 주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연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업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료처럼 말했다.
"그래, 민지가 정말 열심히 했어. 모두의 공로지."
회의실을 나서며 주호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서연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불안했다.
그날 밤의 일을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혹시 민지에게 말할 가능성은 없는지...
오후 내내 주호는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그는 결심했다.
서연에게 직접 이야기해야 했다.
그는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잠깐 시간 있어? 얘기 좀 하고 싶어.'
몇 분 후, 서연의 답장이 왔다.
'그래. 나도 할말이 있어. 퇴근 후 로비에서 만날까?'
오후 6시, 스카이 본사 로비.
주호는 로비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서연이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회사를 나섰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서연아, 그날 일... 정말 미안해."
주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연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날 우리 둘 다 술에 취했던 거고... 이제 다 지난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주호는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다.
"응 정말이야. 사실 나도 조금 미안하고 . 주호 너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주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연이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보다 배고프지 않아? 저녁 같이 먹자. 오랜만에 편하게 대화도 하고. 동료로서."
주호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 기회에 모든 것을 확실히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좋아."
서연이 이끄는 대로 그들은 강남의 한 고급 일식당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함께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하하! 정말요? 그렇게 된 거였어요?"
주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
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 자리에 민지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녀 앞에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둘은 와인을 마시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어머, 저기 민지씨 아니야?"
서연이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민지와 현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민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연이는 주호의 팔짱을 끼며 그자리로 이끌었다
주호는 민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혼란과 의문이 읽혔다.
현우가 말했다 "아는 일행이신가 바요? 저는 괜찮으니깐 식사 같이 해요"
주호는 현우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서연이 먼저 대답했다.
"좋아요! 어차피 우리도 자리 찾고 있었어요. 괜찮죠, 민지씨?"
민지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가 입술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주호는 알 수 있었다.
"물론이죠. 같이 먹어요."
네 사람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서연과 현우가 대화를 이끌어갔다.
두 사람은 첫 만남이었지만, 놀랍도록 대화가 잘 통했다.
특히 뉴욕에서의 경험, 패션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의기투합했다.
"현우 씨는 어떻게 민지씨와 알게 되셨어요?"
서연이 물었다.
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민지를 바라보았다.
"같은 에이전시 소속이 되면서요. 사실 전부터 민지 씨 팬이었어요. 그녀의 콘텐츠 스타일이 정말 독보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현우의 칭찬에 민지는 살짝 부끄러운 듯 미소 지었다.
주호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주호 씨와 서연 씨는 오래 아는 사이인가요?"
현우의 질문에 테이블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대학교 동기에요, 그리고 지금은 또 같은 회사 동료고요."
주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민지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손가락으로 와인잔 가장자리를 계속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니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민지 씨, 다음 주에 제가 진행하는 패션 행사 준비는 잘 되가나요?"
현우가 화제를 바꿨다.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의 다 됐어요. 콘텐츠도 대부분 준비했고요."
"혹시 이 행사, 스카이 협업 프로젝트와 관련된 건가요?"
서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민지와 현우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카이의 MZ세대 채용 캠페인과 연계된 패션 쇼예요. 현우 씨가 주도하고, 제가 콘텐츠를 맡았죠."
"와, 그럼 우리 모두 같은 프로젝트네요! 저도 스카이 마케팅 쪽에서 이 프로젝트 담당하고 있거든요."
서연의 말에 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요? 그럼 더 자주 뵐 일이 있겠네요!"
주호는 민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이 우연한 만남, 그리고 네 사람이 엮이게 된 상황이 과연 정말 우연일까?